2025 소공전 프로젝트 _ 최희준 <허술한 풍경> 전시 서문
허술한 풍경: 눈사람이었던 것
최예솔 (소설가)
오래된 냉동실 구석에서 눈사람을 발견했다. 언젠가는 잘 알았던 눈사람. 내가 만들었거나 내가 발로 차서 부순 눈사람. 그사이 눈사람은 늙었고
조금 지쳐 보였다. 눈사람이 몸을 덜덜 떨기에 나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눈사람은 춥다고 대답했다.
눈사람인데 춥습니까.
눈사람이라서 춥습니다.
나는 눈사람을 꺼내기 위해 많은 것들을 치웠다. 오래도록 얼어있던 것들. 언제 넣어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
딱딱하게 굳은 놀이터와 수족관. 바다 위의 부표. 어디에도 보낼 수 없는 편지. 내가 만났던 애인과 내가 가졌던 풍경.
그 모든 것들은 눈사람과 다를 바 없이 허름한 냉동실 안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이런 데서도 늙는군요.
시간은 어디서나 흐릅니다.
냉동실 밖으로 나온 눈사람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노쇠한 눈사람. 눈사람은 나이 든 만큼 천천히 말했고 천천히 녹았다.
우리가 만난 지 오래되었습니까.
눈사람이 물었다.
네. 당신을 만든 애인과 헤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새로운 애인은 없습니까.
새로운 애인도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눈사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사람의 주위로 동그란 물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자국은 언젠가 내가 밟고 지나갔던 비 내리는 풍경을 닮았다. 질척거리는 흙 사이사이 고여있던 물웅덩이를 닮았다.
나는 냉동실에서 모서리가 조금 깨진 와인잔을 꺼냈다. 눈사람이 전부 녹으면 그걸 다 마실 요량으로.
적당히 녹은 눈사람은 와인잔에 꼭 맞게 들어갔다. 눈사람은 와인잔에 기대어 오래 쉬었다.
그런데.
얼마 남지 않은 눈사람이 말했다.
눈이 먼저입니까 물이 먼저입니까.
눈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한 잔의 희뿌연 물이 되었다. 와인잔에 담긴 물에서 작은 파동이 일었다. 나는 눈사람을 전부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