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부재 사이: 최희준의 역설적 그리기
한정민(미술이론)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해
손바닥 안에 무한을 붙들고
시간 속에 영원을 붙잡아라.”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ca. 1803) 중에서
서기 1세기, 로마의 정치인이자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는 자신의 저서 『박물지(Naturalis historia)』(AD 77)에서 회화와 조각의 기원을 부타데스 신화에서 찾고 있다. 고대 도시 시키온(Sicyon)의 도공 부타데스(Butades)의 딸 코라(Kora)는 고린도 출신의 젊은 청년과 사랑에 빠졌고, 다음 날 전쟁터로 출정할 연인과 작별 인사를 하며 촛불에 투영된 연인의 그림자의 윤곽선을 벽에 남겼다. 죽음의 그늘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맞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벽에 비추어진 연인의 실루엣을 그리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부타데스는 여식이 그린 윤곽선에 점토를 덧붙여 소성함으로써 아름다운 청년의 형상을 견고한 부조로 존재케 했다. 그를 영원히 기억하기를, 그가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라며 말이다. 이처럼 그림 그리기는 망각과 필멸의 인간적 운명을 영원히 기억하고 존재케 하려는 역설적인 저항으로부터 추동되는 듯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희준은 전시장 바닥에 끝없이 펼쳐진 캔버스를 따라 신체를 움직이고, 색색의 가루 안료를 비비고, 긁어내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그렇다면 그녀가 남기고 있는 이 흔적들은 무엇을 붙들길 욕망하고 있는가?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1789)와 『경험의 노래(Songs of Experience)』(1794)라는 삽화시를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신화적 세계로서의 ‘낙원’과 원죄와 타락의 ‘지상’을 ‘순수’와 ‘경험’이라는 반대 상태로 제시하며 우리의 인식론적 지평을 흔든다.
작가는 블레이크의 시선이 들려주는 신비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숨> 시리즈(2020-2021)에 돌입한다. 분채와 안료를 손으로 문지르며 캔버스 위에 안착 시키는 작업은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에서처럼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손바닥 안에 무한을 붙들” 듯 물질적 잔존을 통해 발산되는 ‘영원한 현재의 순간’을 소원하는 기복적 행위로도 읽힌다.
현실에의 억압이나 문명사회의 모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대자연에의 의탁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작가는 작품의 소재를 인간적 세계로부터 벗어난 아프리카 초원, 산수풍경 등 자연 상태에서 찾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희준이 <숨> 시리즈에서 그리는 세계는 전원시나 문학, 미술에서 목가적이며 평화로운 이상적 땅으로 묘사되는 아르카디아(Arcadia)라든지 동북아 도가 문화의 무위자연의 세계와도 일견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영원한 현재의 순간’을 틔워내고자 했던 제스쳐의 효과는 <물로 사라지는 그림자들>(2021)에 이르러 물그림자나 버드나무의 흔들림처럼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가 일순의 허망함 속으로 덧없이 사그라든다. 이는 자신이 그토록 소망했던 ‘절대적 존재’의 확립이 사실 신기루처럼 실존하지 않는 환상에 다름 아니었음을 자각하는 처절한 몸짓처럼 보인다.
여기서 드러난 존재의 패러독스는 <She(Ophelia)> 시리즈(2022)에서 한층 전위된 양태로 표명된다. 작가가 모티브로 삼고 있는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비극 『햄릿(Hamlet)』(1895)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비련의 여주인공인 그녀는 여타 작품들에서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한 인간상으로서 그려져 왔다. 한편, 이 위대한 희곡 속 인물을 모티브로 한 최희준의 작품은 오필리아가 강물에 투신함으로써 맞이한 죽음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숭고’하고 ‘절대적’인 ‘현재성(presentness)’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하고 ‘범속한’ ‘현전성(presence)’에 있다.
다시 말해, 작가가 그리고 있는 오필리아는 비극적이며 숭고한 영웅주의적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물에 뛰어 들어 죽음으로서 사물(시체) 되기를 선택한 인간의 불완전한 존재성에 가깝다. 여기서, 영원의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던 신탁은 미완의 범속성으로 퇴락한다.
그런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에서 작가가 캔버스 위에 애써 쌓아 올리고 밀착시켰던 견고하고 밀도 높은 가루 안료는 이제 미완의 상태로 위태롭게 화면 위에 흐드러져있다. 덧붙여 2년 만에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인간 형상은 물 위를 부유하는 한갓 사물처럼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 오랜 시간 예술 작품 속에서 다뤄진 수직적 인간 모티브는 “행동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율적인 존재성을 외현하는 하나의 증거였다. 하지만 <She(Ophelia)>에서의 그것은 사물이나 동물처럼 대지 위에 그저 던져진 수평적 형상으로 표명된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짐을 자초하는 부조리한 상황은 공존할 수 없는 양가적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최희준의 그림그리기는 문학적 서사의 재현이나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모더니스트적 신념 그 어느 지대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외려 아무도 밟은 적 없는 미지의 길 위에서 종착점 없이 배회하는 방랑자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존재의 그림자와 기억을 영원히 붙잡아 경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 무상함과 불확실함을 은밀히 노출시키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작가의 그리기는 그런 점에서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다.
여기서 작가가 남기고 있는 이 미약한 발자취는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1952)에서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을 연상케 한다. 인간 존재의 조건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Something for Nothing)’을 향해 그저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 즉 무의미의 범속성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던져 냄으로서 자신을 가능케 하는 역설적 그리기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