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궤적, 소금의 숨결: 고운 체로 걸러낸 기억의 잔상
미술비평가 정혜윤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풍경은 어렴풋하지만, 그날의 감정과 다른 감각들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 우리를 흔들곤 한다. 최희준의 작업은 이런 우리의 기억처럼 실재하는 대상을 환상 속 꿈 속에서 처럼 본 풍경과 같은 느낌을 준다. 대상을 고스란히 옮겨오는 것이 아닌, 고운 체에 쳐서 걸러져 남아있는 잔존물만 그린 듯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화면 위에 살포시 올려진 풍경의 형상들은 마치 곤충이 탈피하고 남은 얇은 껍데기처럼 투명하고 가냘프다. 이 형상들은 깨질 것같이 연약해 보이고 고요해 보여도, 사실 그 이면에 수많은 에너지와 흔적의 겹겹이 쌓인 응집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의 회화적 언어는 물질의 무게에서 벗어나 있다. 흔히 예술 작품들은 재료가 가진 물리적인 성질들이 드러나거나, 작품 속 대상을 명징하게 묘사해 그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지만, 작가의 작품 속 공간에서 이 두 가지 특성, 즉 매체적 질량과 구상적 형태은 완전히 무용해진다. 작품에 사용된 재료들의 특징과 사물의 단단한 외곽선도 모두 가려버리는 아스라한 안개와 섬세한 선의 궤적만이 모호한 풍경의 경계를 빚어낸다. 무게감을 덜어낸 이 비물질적인 공간은 역설적으로 풍경 이면에 숨겨진 본질을 마주하기 위한 통로가 된다.
이처럼 물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풍경들 속에서는 자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가는 작품과 연관된 공간의 자연적 특성을 고스란히 조용하게 드러내며 존재의 근원을 시각화하려는 형이상학적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작품 속에 존재하는 자연들은 절대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이번 전시의 대표작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궁평항 근처 갈대밭을 모티브로 삼은 <들판> 연작과 <바다 가는 길>은 우리가 흔히 바닷가에서 느껴볼 수 있는 특유의 소금 낀 짠 내와 시시각각 변화하는 소금기 어린 바람이 화면에 뿌옇게 서려 있는 것만 같다. <Salty> 역시 이러한 바다 내음을 그대로 품고 있는 자연의 연장선상에서 관객을 기억 속 장소로 초대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변하지 않고 존재할 자연을 표현하고 있으나, 그 존재들은 우리의 기억에서 감정과 날씨, 벌어진 사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기도 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의 형태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오직 연약한 실체로서만 머문다. 풍경은 인식의 주체인 우리와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일시 정지된 이미지를 포착하는 최희준 작가는 흐트러지는 순간과 기억의 잔상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 잔상들은 아련하게 겹치고, 시간과 감각의 흐름 속에서 마치 손끝에서 부서질 듯 아련하고 흐릿한 변화를 담아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조용히 그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모호하고 투명하게 그려진 그녀의 작품 속 풍경은 현실을 넘어 기억과 감각의 또 다른 층위로 우리를 이끌고, 흘러가는 시간과 사라져가는 순간들의 의미를 잠시 멈춰 서서 되새기게 만든다.